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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지털 사진기 변천사


2001년 후지필름에서 출시한 120만화소의 디카를 업무용으로 처음 샀었고, 120만 화소는 색표현력이 너무 제한된다는 이유로 2004년도 초에 올림푸스 400만화소의 하이엔드 모델에 60만원 중반의 가격을 지불했다.  출장가야할 일을 카메라로 해결했으니 훨씬 경제적이었다.  2005년 12월 Samsung에서 Pentax 제품을 이름만 바꿔 출시한 가성비 좋은 DSLR을 한 인터넷쇼핑몰에서 첫구매자에게 주는 10% 할인쿠폰을 적용하여 70만원초반대에 손에 쥐었다.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갖게된 취미때문이었다.  디카에서 시작된 사진취미가 사진의 질을 위해 필름카메라로 넘어갔다가 디지탈의 편리함으로 돌아온것이었다.  그후 2년쯤 지났을까?  TV에서 Kodak dica PR에 꽂혔었고, 시간이 지난 어느날 매장에 디스플레이 되어있던 단종된 제품을 싸게 가져왔지만, 반년만에 샀던 가격에 되팔았고, 1년쯤 뒤에 회전액정과 감성적인 결과물에 꽂혀 단종된 Contax제품을 알아봤지만 구하지 못했고, Sony의 단종된 회전액정의 디카를 리퍼제품으로 구입했다.  몇년 뒤 사진생활이 주춤할 무렵, 사진취미를 다시 가져보자는 마음으로 Sony F828 중고에 9만원이 넘는 정품배터리를 추가로 들렸지만, 덩치는 DSLR보다 크고 sensor는 작다보니, 결과물에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DSLR을 대체하지 못하고 친구동생에게 배터리값에 넘겼었다.


일 때문에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내린 결론은, 일상을 찍는 사진기는,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 첫번째 필요조건이었고,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sensor의 크기는 부수적인것이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스마트폰은 이미 사진찍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며, 화질은 예전의 스냅디카에 비해 훨씬 좋아졌고, 한때 사진기 시장을 대체할거라는 이야기가 만연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진기의 시장이 죽지않고 살아남아 있는 것은 sensor의 크기에 한계가 있는 스마트폰이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내가 오래전에 샀던 DSLR을 가끔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스마트폰으로 사진기를 대신해 왔었고, 자연스레 사진 취미를 잠시 접었었다.


지난 몇주간의 고민 끝에 손에 넣은 카메라 RICOH GR II.
이모델이 출시되었을때, 직업으로 또 취미로 사진기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거리로 떠오르던 2013년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그 사진기의 두번째 모델이 출시된 때가 2015년 중반이었고, 2018년 9월 세번째 모델이 출시된다고 한다.  GR II의 가격이 백만원에 육박하던 출시가에서 칠십만원 중반 이하로 떨어졌기에 갈등이 생겼다.  다가오는 9월에 출시해서 시장에 풀리기까지는 지금부터 반년은 걸릴테고, 그동안 열심히 사용하면 그만큼 저렴하게 지불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와 신제품에 대한 갈망이 상반되어 혼란스럽게 했다.  새모델의 출시가는 아마도 백만원 전후가 될것이니 지금이 구매 적기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게 되고, GR II의 현재가격은 때마침 가구를 만드는 친구의 부탁으로 일을 도와주고 수중에 들어온 돈의 범위내에 있다는 또하나의 지원군을 만들어 낸다.  7월초 한국을 방문하는 사촌에게 캐나다 현지 가격을 알아보기도 하고, 일본에서 직접구매할 경우의 비용도 알아봤지만, 별로 덕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사무실 비품으로 구매해서 부가세 환급을 받았을 경우, 미국시장에서 사는 것과 비슷한 가격이 된다.  그 결과 5월 25일 사무실로 택배가 배달되고, 타이핑을 하는 이순간 책상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Brompton 지름 이후의 또다른 후회없는 지름이 될것이라고 최면을 걸어본다.


손에 쥐어 보니, 세계의 많은 amateur와 professional photographer들이 몇 안되는 최고의 snapshot camera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다만, 이 카메라의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할 것이고, 내가 그 많은 기능들을 숙지하고 손에 익혀 사용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뷰파인더를 보며 사진을 찍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볼때면, 언제나 사진에 남기고 싶었다.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오늘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평온한 밤, 꿈꾸지 않는 밤, 아침까지 잠에서 깨지 않는 밤이 되게 해달라고..
혹시 깨려하면, 대신 나를 깨워달라고 기도드립니다.


========== ========== =======


RICOH GR II 

size : 117L * 63H * 35D mm 
weight : 248g (incl. battery)
sensor size : APS-C
focal Length : 28mm (35mm equivalent)
body material : magnesium alloy


Sony F828, Vario-Sonnar T*


Sony F88 (회전렌즈와 1cm Macro)


Kodak V570 dual lens (V705으로 가기위해 팔았지만, 결국 V705은 손에 넣지 못했다.)


SAMSUNG GX-1S (with SMC Pentax-A & National 281)



OLYMPUS C750uz (나를 사진과 친해지게 만든 카메라)


FUJIFILM FinePix1200 (my 1st dica) 


필름카메라와 즉석카메라는 기회가 되면 전부 꺼내서 사진찍어 올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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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K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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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11일

Personal memento 2018. 5. 12. 00:55

며칠전부터 왼쪽어깨가 많이 아프다.
작년에도 같은 증상이 있었고 병원에 갔었지만, 특별히 치료가 되는게 아니라 시간이 가야했다.  파스를 붙였지만, 큰 효과는 없다.  이십대 초반에 다쳤던 휴유증이라고 생각한다.  가구공장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육통은 움직여서 몸을 풀어야 한다고, 일을 좀 도와달라고....


이틀을 밤잠을 설쳤다.  타이레놀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다.
병원을 가고 싶지도 않다.
한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타이레놀은 2알을 먹는거란다.



너무 화끈거려서 사용을 잘 안하던 - 오래전에 캐나다 출장때 사온 - 파스를 바르고, 타이레놀도 2알 먹었다. 
어느것이 효과가 있는건지 모르지만, 확실히 하루가 편하다.
조금전에 밤에 먹는 타이레놀(친구가 출장중에 사온)을 두알 먹었다.
오늘밤은 어깨통증으로 잠을 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한사람을 위한 기도를 되풀이 한다.
이제 기도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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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쯤 부터였던가?  고등학교동문산악회 산행대장을 4년쯤 했었다.  산악회회장이 바뀌면서, 산악회가 술판으로 변질되는 것을보며 산악회에서 발을 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악회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동문산악회를 활성화 시켜보자면서 같이 산에가자는 요청이 왔다.  산에는 갔이 가겠다고 했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누군가는 봉사를 해야하고, 예전에 같이했던 좋은기억으로 남아있는 동문들이 나서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해보기로 했고, 결국 다시 산행대장자리를 맡았다.  이름이 등산을 하는 산악회와 산행대장이지만, 궂이 따지자면 하이킹이나 트레킹을 하는 동문모임에 불과하다.


그동안 산에 안갔던 것은 아니었다.  주말에는 별일 없으면, 산에 올라갔다오기도 하고, 산을 좋아하는 친구가 연락이 오면 근교 산으로 돌아다녔었고, 지난 몇년은 산악자전거로 산을 오르내렸었다.


그렇게 시작은 했지만, 오래전 20대에 다쳤던 무릎이 요즘들어 부쩍 자주 좋지않음을 느끼고, 그래서 산에 갈때는 왼쪽 무릎에는 보호대를 착용한다.  보호대를 조금 좋은것으로 하나 알아봐야지 생각하면서 아직 예전에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황령산 둘래길을 한바퀴 돌았다.  15km 정도의 거리, 걷고 쉬고 밥먹고 총 5시간 남짓.  걸으면서 기도를 했었다,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이의 평온함을 위해.


3월 부터 일주일에 하루 라틴어 수업을 듣는다.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뭔가를 찾다가 시작했는데 특별히 활용할 곳은 없다.  강의는 신부님이 하시는데 수업내용보다는 부수적인 이야기들, 특히 세계사 이야기가 재미있다.  매주 월요일 17시쯤 퇴근을 해서 자전거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수업을 들으러 간다.  장전동에서 내려 적당한 곳에서 저녁을 먹고 19시에 수업이 시작된다.  원래 1시간 반 수업인데, 마치면 밤 8시50분정도 된다.  그렇게 월요일은 뭔가 할일이 하나 있다는게 만족스럽다.


며칠전에 다읽은 A. J. Cronin의 천국의 열쇠.  이책이 1940년대 처음 발간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인쇄되어 팔리고 있는 이유는 읽어본 사람은 다들 알것이고, 주인공 프란시스 신부의 종교를 뛰어넘은 이타적인 삶과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며, 내가 그의 한 점 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아래는 그 책 중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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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st of March: 
A Festum of St. Bonavita who lived at Lugo located nearby Ravenna in northern Italy in the 14th century.

어제, 3월1일 목요일, 사순시기 중에 드리는 평소와는 다른 예식이 있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내세례명의 축일이기도 하여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주중 미사가 끝날무렵부터 시작되는 처음 접하는 예식.  제대위에 화려한 십자가가 놓여지고, 철로된 용기안에 풀(?)을 넣어 불을 붙이고 연기가 단상에 옅은 안개처럼 자리하고, 풀이 타는 냄새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묵상시간에는 성전내의 조명이 꺼지고, 조용함이 평화로웠다.  

언제나처럼, 마음속에 자리한 그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 드렸다.


어제는 낮에 달이 무척 선명하게 떠있었고, 그때문이었는지, 밤에는 꿈속에서 어딘가를 달리는데, 하늘이 별천지고, 그중에 오리온 자리가 선명하게 보였었다.  부산 근교에서는 별을 보기가 힘들지만 오늘은 저녁에 산에 올라갔다 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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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경 잠에서 깼다.  씻고, 밥먹고,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나갈 준비를 한다.
친구와 함께 성당에 갔다가, 밥먹고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내려주고 집에 왔다.


집에 오는 길에 광안리에 있는 순교자성지에 들렀다.  전에도 한번 가본곳이지만, 오늘은 성당에서 나눠준 본당순례 책에 도장 찍을 목적으로 갔다.  가까운 곳부터 시간날때 들러서 도장을 찍어 나가는 것도 나름 재밋을듯 하다.  이기대, 광안, 대연, 남천성당에서 이미 도장을 찍었다.  


SNS에서 한사람의 음악프로파일이 바뀐것을 봤다, 요즘도 한밤중에 자다 깨는듯 하다.
나도 자다 깨는 경우가 많지만, 늦은밤까지 잠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사람도 많이 힘든듯 하다.


매일 잠자기 전에, 또 아침에 잠에서 깨면 기도를 드린다.  밤에는 그사람이 한밤에 잠에서 깨지않고, 꿈도 꾸지않고 아침까지 편안하게 자게 해달라고, 아침에는 그사람이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수 있도록 함께하여 해달라고 빈다.

내가 하는 기도가 별로 도움이 안되는걸까?  내가 해줄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아침저녁 또 시간날때마다 그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어제 밤은 내게도 힘든 밤이었다.  2시가 훨씬 넘어서 잠이 들었었다.  그래서일까 하루종일 피곤했다.

이것저것 주말에 하려고 미뤄뒀던 욕실수리, 자전거안장가방수리, etc. 일을 하고나서 잠시 침대에 누워 책을 몇자 읽는듯 했는데, 정신없이 졸다깨다를 반복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또다시 졸다깨다를 반복했고, 이 글을 타이핑하는 지금도 하품이 난다, 그렇게 졸았는데도 피곤하다.  밤잠을 설친 일이 많았었나?  지난 일주일의 피로가 한꺼번에 쏫아지는듯 하다.


오늘밤은 우리 모두, 제발 좀, 깨지도 말고, 꿈도 꾸지말고, 평온하게 그렇게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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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며칠전 타고왔던 ofo공유자전거가 그대로 있다.  그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만 가자는 생각으로 탓는데, KBS방송국, 대남교차로, 부경대를 통과하고 이기대 입구에서 내렸다.

미사를 마치고, 경성대 근처까지 걸었다.  버거킹에서 와퍼를 먹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산에 올아가고 싶어졌다.  경성대 정문으로 통과한다.  독수리가 갇혀있는 새장을 지나 걷다보면 야구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야구장을 지나면 황령산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몇개를 넘어서 갈수도 있고, 우회해서 갈수도 있다.  바람고개까지 가서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가 바람고개 직전에 있는 봉우리를 보며 우회하지 않고 올라가면 "仙風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신선과 바람이 만나는 곳인가?  선풍정을 지나 내려가면 바람고개가 나온다.  문현동에서 올라오는 길, 임도를 따라 수련원으로 가는길, 좁은 등산로를 따라 가면 편백나무숲을 지나 약수터를 거쳐 수련원쪽으로 갈 수도 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봉수대쪽으로 오른다.  가파른 길을 걸어서 올라가면 해발400미터의 "사자봉"이 나오고 사자봉에서 내려가서 황령산에도 성곽이 있음을 알게된다.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봉수대가 나온다.  수련원쪽을 지나가면, 후문쪽에서 내려가는 길이 있고, 길은 완만하다.  예전에 산악자전거를 타고 많이 내려가던 길.  편하게 내려갈 수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쪽보다는 좀 가파른 길을 택했다.  익숙한 능선을 타고 걷다보면 심한 내리막이 나오고, 한참을 내려가면 산길이 끝이난다.  그렇게 오늘 트래킹도 끝이났다.

걷고, 타고, 달리고, 그렇게 땀을 흘리면 기분이 좋다.
책상앞에 앉아 있을 놈은 절대 아닌 듯하다.  떠나고 싶다.  어디로든 멀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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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 시작되고 우울한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독감으로 힘든며칠이 지나가고, 어제는 답답함에 지쳐 산에 올라갔다.

잠깐이지만, 걷다보니 나쁘지는 않다.

오늘 아침 성당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주차된 차를 빼는게 불가능했다.

일요일 아침 쉬고있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평온을 깨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10분정도를 걷고 버스를 타고가서 다시 걸었다.

성당에 앉아 미사시작을 기다린다.  예배당에 앉아있는 동안은 마음이 편하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향한다.

터벅터벅 걷다가 남천동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고 다시 또 집을 향해 걷는다.

집안에 들어오니 외롭다, 그냥 우울한 느낌,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 같은 느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다.  이세상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싶다.

아파서 힘들었던 지난 1주일간, 나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그냥 답답하다.

독감으로 처방받은 약을 매일 먹었다.  약먹는게 힘들다.

약기운이 몸을 좀 편하게는 하겠지만, 정신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점심때는 내 나름대로 약을 안먹기로 한다.

시간이 좀 더 오래걸리겠지만, 몽롱한 느낌에 생활이 힘들어 차라리 아픈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결정했다.

약을 그만 먹으니, 정신이 맑아지고, 산길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분명 힘든데, 편하다.

힘들어도 살만하다.


나는 아직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냥한다.  항상 그렇듯, 너를 위해 기도한다.  몸도 마음도 아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너를 위해 기도하는 동안은 잠깐이지만, 마음이 아주 잠깐이지만, 편안하다.

그렇게 기도하는 습관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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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해가 바뀌는 순간이 기다림과 설레임인 시절이 있었다.
언제 부턴가 그 기다림과 설레임은 아무런 느낌없이 지나가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 마음으로 바뀌었다.
2017년이 그랬던 것처럼, 2018년 또한 그렇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시작하고 끝을 향해 달릴거다.

2017년이 9일 남았다.
이번주는 미뤘던 방학숙제를 하듯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일요일, 대학강의를 하는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서는, 기상악화로 항공편이 결항되어 여행에서 돌아오질 못한다면서 기말고사 시험 감독을 대신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왔었고, 18일/월요일아침 A형B형으로 나뉜 시험를 프린팅하고 강의실을 찾아가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수 있도록 했다.
시험시간중에 고모에게 연락이 왔는데 전화를 받지못했다.  시험 끝나고 다시 연락드리니, 고모부가 몸이 안좋으셔서 몇일 입원해야 하신다고 내가 같이 가 주셨으면 했다.

다음날/화요일아침 11시 경 고모집에 가서 고모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몇가지 검사를 하고, 입원수속 후 한참을 기다려 입원실을 받았다.  회진시간을 기다려서 의사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나니 저녁시간이 다되간다.
그날 저녁 8시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다음날 아침 9시 전까지 병원으로 와 달라고 한다.  검사와 시술을 위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요일아침, 7시 30분 쯤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동 역에 내려서 병원으로 올라갔다.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기다린다.  11시30분경 시술실로 들어가셨다.  보호자는 근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의사선생님의 전화가 와서 시술실로 들어오라고 한다.  설명은 정말 친절하게 잘 해주셨다.  그리고, 종교가 있는지 물어본다.  환자는 천주교, 보호자인 나는 교리공부 중이라고 하니, 기다하자고 한다.  기도를 하고 나오면서 고마움과 함께 천주교에 발을 들인것이 새삼스레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고모에게 보호자 자리를 잠시 맏기고 공장에 갔다가, 사무실에 와서 일보고 다시 병원으로 올라가서 담당의사 회진을 기다렸다.
퇴근 후, 지난주에 준비했던 선물을 포장했다.  지난 6개월간 교리공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과 수업준비를 번갈아가며 해주시던 봉자사 두분에게 드릴 선물이다.  목요일에 오시는 봉사자 분께 먼저 드리고, 나머지 둘은 세례받는 날 드리기로 한다.

다음날 목요일아침도 7시쯤 집을 나섰다.  8시30분 담당의사선생님의 회진을 기다렸다.  그날 오전 11시경 퇴원수속을 했다.  오후에 친구병원에 건강검진 예약을 했다.  퇴근후 저녁식사를 건너뛰었다.  오후에 배달왔던 자전거 튜브를 브롬톤에 장착하고, 차가운곳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성당으로 마지막 교리수업을 받으러 갔다.  마지막 수업은 신부님이 직접 진행하셨고, 24일/일요일에 있을 영세식 연습도 했다.

아침8시30분경 병원에 도착해서 검진을 하고, 의사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한다.  위에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조직검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내일모레 받을 세례때문인지, 뭔가 하나를 마쳤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마음이 편하다.

금요일/오늘저녁, 모임이 하나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다음에 보자는 말을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신, 부모님과 조카딸아이와 함께 단팥죽을 먹으러 갔다.

요즘 운동량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최근에 자전거 체인이 끊어지면서 자전거도 타지 못했었다.  이제 자전거도 완전히 고쳤으니, 내일은 자전거를 타고 조금이라도 달리고 싶다.

내일모레/일요일/크리스마스이브 11시 미사, 그시간을 깃점으로 내인생이 어떻게 또 변화가 올지 기대를 한번 해봐도 될까?
믿음도 습관이라고 배웠다.  물론,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잘 할 수 있을까 ^__^

오늘, 끊어진 체인으로 열쇠고리를 하나 만들었다.  지난 6개월간 함께 미사를 드리며 가르쳐 주던 친구에게 줄 선물.
요즘 열쇠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좋아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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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얼마 안남았다.
교리공부 시작한지 한달정도 지나서 1차 예식이 있었고, 보름전쯤 2차 예식이 있었고, 미사가 끝난후에 성지순례를 갔다왔다.

오늘현재, 수업시간은 두 번의 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은 신부님이 직접 하실거라고 한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게 대부분이다.
그동안 교리공부를 하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매주 목요일 밤에 수업하러 나오고 일요일은 미사드리러 나오고.

교리선생님과 교리수업 봉사자 두 분께 드릴, 부담 없을 정도의 선물을 준비한다. 마음같아서는 같이 수업했던 4명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지만, 좀 오버인듯하여 안하기로 한다.

별일 없으면 12월24일 미사중에 세례를 받을거고, 24일 밤 9시에 성탄미사에 참여할테고, 그렇게 시간은 다가올거고 흘러갈거다.

대중적인걸 싫어하는게 내 이름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비주류에 마음이 가고, 또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세례명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성인의 이름을 선택했다.  물론, 주변에서 선택에 도움을 주긴했지만, 처음부터 원했던 이름이기도 했고, 그 성인의 간단한 역사가 내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St. Bonavita를 나의 성인으로 받들고, 그의 삶을 닮아보려고 노력해야 될게다, 물론 쉽지 않을테고,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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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K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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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교리시간 전에, 세례명과 대부해줄 사람을 정했냐고 물어본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제 시간이 많이 없다. 
12월 되면 바쁘다.  그러니 빨리 결정하라고 한다.
세례명 리스트를 인터넷에서 찾아 프린팅해서 시간 날때마다 찾아본다.

많고 많은 세례명을 읽어보며 마음에 드는 이름에 밑줄을 긋고,
어떤 이름을 선택하면, 어떤사람이었는지를 찾아본다. 
그 중에서 또 추리고 추려낸 세례명들.
성인의 이름을 선택하고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긴하지만,
너무 유명한 이름, 너무 높은 직책을 가진 성인은 더 많이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왕이면 흔한 이름은 피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성인 중에, 많이 사용하지 않는 그런 세례명을 찾아본다.


아래는 그동안 뽑아놓는 몇 개의 세례명들이고, 그중에 주변의 의견을 모으는 중 ;

(2017년 11월 7일 현재) ;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이 내이름과 운율이 맞다고 하는 친구 1명,

"유스티노"라는 이름이 멋져보인다는 친구 2명, (조카딸曰 "유스티노"는 공룡이름 같아요)

"보나비타"라는 이름이 좋다는 친구1명 + 조카딸.

- - - - - - - - - - - - - - - - - 

(2017년 11월 12일 현재) ;

"안드레아" : 친구(JT) 1명,

"유스티노" : 친구 3명 (KZH, NMJ, S0S) + 누나 = 4명,

"보나비타" : 친구 3명 (KJH, JHK, SJY) + 조카(zzi~)3명 + 동생 + 사촌 = 8명.

- - - - - - - - - - - - - - - - - 

세례명도 대부도 아직 결정된건 없다.

선택은 항상 힘들다.
어떤이름을 선택해야 후회가 없을까?
선택은 한번이고, 후회는 계속될거다.
좀더 고민을 해보자.


--- 아 래 ---

- 글라스티아노 (Glastian) :  스코틀랜드의 파이프 지방에서 태어난 성 글라스티아누스(Glastianus, 또는 글라스티아노)는 파이프 교구의 주교로서 픽트(Pict) 사람들과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종식을 중재하였고, 픽트 사람들이 점령되었을 때 그들의 권익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란델리노 (Landelin) :  프랑스 바폼(Bapaume) 교외의 보(Vaux)에서 태어난 성 란델리누스(Landelinus, 또는 란델리노)는 어릴 때부터 캉브레(Cambrai)의 성 아우트베르투스(Autbertus, 12월 13일)의 지도를 받아 왔으나 18세 때에 원장의 눈에 나쁘게 보여 쫓겨났다. 그때부터 그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 강도짓을 비롯한 범죄꾼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겸손한 회개자가 된 그는 자신의 참회를 위해 늘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성 아우트베르투스 주교에게 되돌아갔고, 지난날을 보속하는 뜻으로 은둔생활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30세 때에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설교보다는 은수자로서 보속의 삶을 계속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상브르(Sambre) 강변의 라우바흐(Laubach)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끌린 몇몇 독수 은수자들을 제자로 맞아들였고, 654년에 그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위한 로브(Lobbes)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수도원이 완성되자 동료들의 청대로 원장직을 맡았으나, 후에 원장직을 성 우르스마루스(Ursmarus, 4월 19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더욱 힘든 일을 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다녔다고 한다. 그는 크레스팽(Crespin)을 비롯해서 가는 곳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지도하였으나 자신은 항상 공동체와 떨어진 외딴 곳에서 홀로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 은수자(隱修者) :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수도자. 4세기 초부터 특히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에게는 이런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방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동방에서는 흔히 은수생활이 공주 생활보다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때 은수사들 간에 극단적이고 때로는 과도한 내핍생활이 행해졌으나 후대에 교회적 권위가 은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고 은수사들로 하여금 수도원 근처에 살면서 상부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서방은 동방보다 은수적 수도생활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11세기 및 13-14세기의 영성적 부흥시대에 재등장하였다. 11세기에 설립된 카르투지안 수도회와 카말돌리(Camaldoli) 수도회는 현재까지 반 은수적 수도생활의 형태를 잘 유지해 오고 있으며 은수사들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수도생활 


- 보나비타 (Bonavita) :  성 보나비타는 원래 대장장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14마일이나 떨어진 루고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운명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원으로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거나, 앉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언제든지 쉽게 명상에 잠겼으며 항상 평온하였다.  그는 참으로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성인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성당이나 부유한 집에서 내쫓긴 가난한 걸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추운 겨울에 헐벗는 이를 보고는 자기 옷을 벗어 줄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주민들은 이런 사람이 곧 성인이라 하여 그를 크게 칭송하였고, 3회원의 생활이 곧 수도생활임을 널리 인식시켰다고 전해온다.


- 세라피온 (Serapion) :  영국 태생인 성 세라피온은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에서 알폰소 9세 휘하의 군인이 되었다가 포로 석방을 목적으로 하는 메르체다리오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브리티시 섬들을 찾아가 은둔소를 세우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무르시아의 무어인들에게 가서 그리스도인 노예 몇 명을 완전히 석방시켰고, 알제(알제리의 수도)에 가서는 더욱 많은 성과를 얻었다. 여기서 그는 포로 몸값 때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 마호메트 교도들에게 설교했으며, 몇 사람의 개종자를 얻기도 하였다. 이것이 무어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성 세라피온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지가 절단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 아리스톤 (Ariston) :  성 아리스톤, 성 크레스켄티아누스(Crescentianus), 성 푸티키아누스(Futychianus), 성 우르바누스(Urbanus), 성 비탈리스(Vitalis), 성 유스투스(Justus),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 성 펠릭스(Felix), 성녀 마르키아(Marcia)와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박해 중에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에서 순교하였다.


- 아벤티노 (Aventinus) :  프랑스 중부에서 태어난 성 아벤티누스(또는 아벤티노)는 은수자로서 살기 위해 은퇴할 때까지 트루아(Troyes)의 주교 성 루푸스(Lupus, 7월 29일)를 도와 가난한 이들에게 구호물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가 은둔하던 장소는 현재 생아뱅탱(Saint-Aventin)으로 불린다.


- 유스티노 (Justin) :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에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성 유스티누스가 에페수스(Ephesus)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은 130년경이다. 그는 이후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를 저술하였다. 그는 순회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가 있는 로마(Roma)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Prima Apologia, Secunda Apologia)을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는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하여 로마(Rome)의 집정관인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게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


- 체올울프 (Ceolwulf) :  영국 노섬브리아의 왕이었던 성 체올울프는 738년에 은퇴하고는 곧장 린디스파른(Lindisfarne)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높은 공경을 받았다.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자신의 역저인 "영국 교회사"를 '가장 성스러운 체올울프 왕'에게 헌정하였다.


- 첼레스티노 1세 (Celestine I) :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에서 출생한 성 코일레스티누스(Coelestinus, 또는 첼레스티노)는 로마(Roma)의 부제였다가 422년 9월 2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싸우는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그와 함께 일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의 친구였다.
    네스토리우스 이단들의 강경한 무리들 때문에 그는 430년에 로마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이단을 단죄하였고,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게는 자신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통보하였으며, 431년에는 네스토리우스파를 공식 단죄한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에 3명의 교황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는 펠라기우스파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팔라디우스(Palladius)를 아일랜드로 파견하여 아일랜드인들을 개종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를 파견했으리라 믿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의 축일을 4월 6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이는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있던 성인의 유해를 로마(Roma)의 성녀 프락세데스(Praxedes) 성당으로 이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 안드레아 Andrew : (Gr., ma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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